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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의 사회사 - 기록되지 않았던 미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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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란 종이나 비단에 그린 작품의 감상과 보존, 보관, 이동을 위해 가장자리와 뒷면을 튼튼하게 보강하는 일이다. 이런 표구의 기본 목적은 작품의 뒷면에 종이를 두 겹, 세 겹으로 발라 튼튼하게 만들어 보존하기 쉽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작품에 어울리는 여러 색깔과 무늬의 비단을 배치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 일도 보존 못지않게 중요하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훼손되었거나 낡은 작품을 수리 • 복원하는 기술까지도 포함된다. 이처럼 표구로 마무리하는 과정이 필요한 작품으로 종이나 비단에 먹이나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꼽을 수 있고 서예나 자수, 탁본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표구 과정을 거치면서 족자, 병풍, 액자의 형태를 갖추게 되고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세워져 감상의 대상이 될 준비를 마친다. (17) '표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종이나 비단에 쓰인 글씨와 그림, 곧 서화(書)의 뒷면에 다른 종이를 덧발라 보관과 사용하기 쉽게 만드는 기술은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 중국에서는 이 기술을 가리켜 '장황(裝潢)', '장배(裝背)'라고 했다. '장(裝)'은 '단장한다' 즉 꾸민다는 뜻이며 '황(潢)'도 '책을 꾸민다'는 뜻을 지니는데 동시에 황벽(黃蘗)나무 즙으로 염색한다는 의미도 있다. 곧 책 표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일을 가리키며, 고대 불교 경전을 황벽나무에서 뽑아낸 노란 즙으로 물들인 데에서 비롯되었다. 황벽나무의 즙은 벌레나 세균이 싫어해서 이렇게 물을 들이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 일본인 표구사가 차린 전문 상업 표구점은 확실히 조선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실 비단 상업 표구점뿐이 아니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미술'과 관련된 모든 것이 조선에게는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아니, '미술...

고양이가 쓴 원고를 책으로 만든 책 - 새끼 고양이, 길 잃은 고양이, 집 없는 고양이를 위한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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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쓴 책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가 타이핑한 원고를 번역한 책입니다. 원고 는 숫자와 문자의 조합으로 이뤄진 암호문처럼 보였습니다. 넓적한 앞발로 자판을 친 오타임을 알아채자 원고는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지능을 지닌 고양이가 쓴 것이 분명했습니다. 오타에 익숙해지자 제대로 타자한 원고처럼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에 대한 비법과 처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18)'이었습니다. 고양이가 인간을 접수하는 걸로 시작합니다. '고양이가 인간 세계로 들어가는 일'을 접수한다고 해. 고양이가 인간의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룻밤 사이에 '인간의 습관과 버릇도 바뀌고, 집도 더 이상 인간의 것(18)'이 아니라 고양이 차지가 돼. 이걸 접수하기라고 부르지. '인간 남자는 대체로 불안정한 종이야. 게다가 특히 집안 문제에는 우유부단하지. 이런 면을 이용하면 인간 남자를 다루기란 식은 죽 먹기야(35)'. '인간이 사물이나 동물을 인간에 비겨 표현하는 것(40)'을 의인화라고 해. '인간 남자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거야(36)'. 인간 남자의 이런 생각을 이용해 적당히 구워삶으면 인간 남자는 고양이를 인간 여자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돼. 인간 남자를 구워삶는 방법을 인간 여자에게 쓰면 안 돼. '인간 여자도 우리 고양이랑 똑같은 방법을 인간 남자에게 써먹기 때문이야(40)'. '인간 여자를 우리 고양이와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도록 해.' '그러면 인간 여자는 늘 고양이 편에 서서 인간 남자에게 맞서는 동맹군이 될 거야. 그다음에는 인간 여자와 함께 안락하고 평화로운 휴전 상태로 살 수 있어(42)'. '인간 아기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이유는 고양이를 자기와 똑같은 인간 아기로 여기기 때문이야(46)'. 인간은 의인화를 잘하기 ...

휴먼스 - 너무나도 그리운 지구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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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일하느라 교육 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교복 입은 애들이 늘 부러웠습니다. 이번 달에 우리 딸이 학교에 들어갔어요. 매일 집에 오면 그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잘조잘 얘기해주지요. 너무 좋아요. 제가 며칠 집에 못 들어오기라도 하면, 우리 딸은 그사이에 있었던 얘기들을 다 기억해뒀다가 한꺼번에 말해주죠. - 파키스탄 라호르 (11) 우리 애들이 장관이라든가 사업가가 되면 좋겠어요. 근데 얘가 올해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보내줄 돈이 없네요. - 콩고민주공화국 카상굴루 (12) 열두 살 때 자전거를 정말 갖고 싶었어요. 아빠가 한 대 사주셨죠. 얼마 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걸 알아챘어요. 아빠는 수리를 맡겼다고 하셨죠. 어른이 돼서 다시 물어봤어요. '아빠, 그 반지 어디 있어요? 제가 똑같은 걸로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그제야 아버지가 털어놓더군요. '그 반지 팔았지. 그때 너 자전거 사느라.' -인도 자이푸르 (34) 우리 아빠는 왜 그렇게 핸드폰만 만지는지 모르겠어요. - 대한민국 서울 (50)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자기 생일이 되면 알려줄 수 있게 말이에요. - 미국 뉴욕 (60) 루시는 차에 치여서 뒷다리를 잃었어요 이미 두 번이나 보호소로 돌아간 적이 있었죠. 엄청 일거리예요. 거의 아이 키우는 거나 다름없어요. 인내심이 아주 많이 필요하죠. 항상 기저귀를 갈아줘야 해요. 시터 구하기가 정말 어렵고요. 하지만 전 얠 1년 반 동안 데리고 있었는데 이제 얘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모두들 루시를 사랑하죠. 그리고 루시도 모두를 사랑하고요. 얘가 꼬리를 흔들 수 없어서 행복한지 어떤지 알 수 없을까봐 걱정을 했어요. 하지만 루시는 눈으로 내게 말해주죠. -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218) 내 인생은 매일 반복돼요. 이 지역은 물로 둘러싸여 있지만 우리 마을에선 접근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매일 아침 두 시간 산길을 걸어 빙하로 ...

전략가, 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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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잡동사니에도 비유할 수 있다. 잡동사니는 다른 사람은 하찮게 볼지라도 그 주인에게는 고이 아끼는 보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소중한 물건이 잡동사니 취급을 받아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일도 종종 있다. 잡초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관점에 따라 잡초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과학적 정의로 볼 때 잡초의 기준은 참으로 어중간하다. (19) 때와 장소에 따라 같은 식물이 잡초가 되기도 하고 잡초가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술적으로는 그렇게 모호하게 분류할 수 없으니 일반적으로는 방해가 되기 쉬운 식물을 잡초라고 한다. (21) 잡초를 '방해가 되는 풀'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하는데, 사실 방해가 되는 풀이 되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잡초를 흔하고 하잘것없는 식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잡초가 어디서나 자라는 건 아니다. 또 모든 식물이 잡초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길가나 밭에서 싹을 틔워 점점 번식해 나가는 일은 식물에는 상당히 특별한 일이며, 방해되는 식물이 되려면 그런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다. 잡초가 되기 쉬운 식물의 성질을 '잡초성 Weediness '이라고 하는데, 이 잡초성이 있는 식물만 잡초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무 식물이나 잡초가 되는 것이 아니다. (24) 잡초는 연약해서 경쟁에 뛰어든다고 해도 강한 식물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잡초는 강한 식물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만 골라서 자라난다. 그런 데가 길가나 인간이 만들어낸 특수한 장소다. (31) 뿌리까지 완벽하게 없애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만큼 잡초는 뽑고 또 뽑아도 자라나지만 잡초를 안전하게 없애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잡초를 뽑지 않는 것'이다. 잡초를 뽑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 그리고 잡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잡초는 뽑지 않으면 빠르게 번식한다. 그러면 잡초뿐만 아니라 관목 등 대형 식물이 연달아 자라나면서 덤불이 되고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 숲을 이룬다. 잡초라 불리는 식물은 ...

시인의 말 -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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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박준/문학동네 20121205 144쪽 8,000원 라면 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 1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2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3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였습니다 4 저희 어머니도 서른셋에 아버지 보내시고, 그때부터 아예 아버지로 사시지 말입니다 5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6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7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8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9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10 봄날에는 '사랑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11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12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 13 「 세상 끝 등...

나의 폴라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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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연구소 유튜브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북극곰과 펭귄을 동경한다면 생생한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평생 그 근처에 갈 기회가 없다면 더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지난여름에 소설가 김금희 작가가 남극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대 때부터 꿈꿨던 일이 현실이 된 겁니다. 약 한 달간 남극에서 지낸 일들을 엮어 책으로 냈습니다. 남극에는 지폐나 신용카드를 들고 가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월동 대원들에게 줄 초콜릿과 세종기지 도서관에 놓고 올 《경애의 마음》을 챙겨서 2024년 1월 27일 출발했습니다. 서울에서 파리와 칠레 산티아고를 거쳐 1월29일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습니다. 인간과 그것이 만들어낸 문명이 없는 자연 속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싶었던 작가는 2월 1일 아침 10시 40분 드디어 남극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세 시간 뒤 킹조지섬 프레이 기지에 도착했습니다. 말뚝을 대신한 얼음에 보트를 고정해놓은 남극이었습니다. 조디악(Zodiac)을 타고 마침내 세종기지 선착장에 도착하니 대원들이 반겨줬습니다. 작가는 펭귄이 되어 세종기지 구석구석을 둘러봤습니다. "남극 자체가 특별히 보호해야 하는 대륙이지만 그중에서도 환경적, 과학적, 역사적으로 존재 가치가 높아 조심히 접근해야 하는 공간을 남극특별보호구역(Antarctic Specially Protected Area), 줄여서 아스파(ASPA)"라고 부릅니다. 세종기지 근처에 있는 펭귄 마을인 나레브스키 포인트는 한국이 주도해서 제정한 최초의 아스파입니다. 김금희 작가는 펭귄 사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제일 먼저 방문했습니다. 완력을 과시하는 용감한 펭귄이 아니라 느리고 작은 존재가 신비롭게 보여주는 태연함에서 감동과 경이를 느꼈습니다. 떠날 때쯤 다시 만난 아기 펭귄을 보며 콧날이 시큰해졌습니다. "인간처럼 펭귄도 개종 좀 늦게 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가장 강한 것만 존속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힘과 속도를 지닌 존재들이 공존하...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 제4차 산업혁명, 경제의 모든 것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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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여러 기술이 한꺼번에 발전하면 혁명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충분한 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그런 변화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두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지금은 세 번째 혁명인 정보혁명이 이행되는 과정에 있다. 물론 이런 혁명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건 결단코 아니다. 실제로 산업혁명의 경우 30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정보혁명은 시작된 지 이제 겨우 50년이 지났을 뿐인데 여러모로 보아 아직 끝보다는 시작 단계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16) '특이점 singularity '이라는 용어는 본래 함숫값이 무한이 되는 변숫값을 의미하는 수학 및 물리학 용어였다. 대표적인 예로 물질의 밀도가 무한히 높아지는 블랙홀의 중심을 들 수 있는데, 특이점에 도달하면 기존의 규칙이 깨지기 때문에 다음을 예측하기가 평소보다 더 어려워진다. 최근에는 이 말이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간사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 기술의 특이점은 일반적으로 최초의 인공일반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 이 실현되어 성인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지적인 과업을 무엇이든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등장했을 때 벌어질 상황으로 정의된다. 이 기계는 발전을 거듭해 인간보다 훨씬 똑똑한 초지능 Superintelligence 적 존재가 되고,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속도와 규모로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17) 정보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정보와 지식이 생산, 자본, 노동, 원자재보다 갈수록 중요해지는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정보는 그 자체로 이미 경제적 가치를 획득했으며, 서비스가 경제 전반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제조업은 2위로, 농업은 3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29) 러다이트 운동가들이나 폭도들은 노동 절감형 기계를 도입하면 대규모 실업이나 빈곤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 경제적, 정치적 의견을 표출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지독...

도둑의 도시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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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의 정의에 따르면 '중범죄 혹은 절취 竊取 를 목적으로 건조물 建造物 에 불법적으로 진입하는 행위'를 침입절도라고 한다. '침입절도가 성립하려면 범인이 건축구조에 불법으로 진입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단순 절도, 소매치기, 강도(42)'와는 다른 공간 범죄이다. 영화 〈오션스 일레븐〉, 〈이탈리안 잡〉, 〈인셉션〉 등을 떠올리면 된다. '침입절도는 대도시의 원죄다. 그도 그럴 것이 무단으로 침입하려고 했던 자들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한 건물에 대해 이야기할 게 많지 않을 테니까. 침입자들은 건축의 정사 正史 에 들어가지 못한 일탈적 존재면서도 건축물 자체만큼이나 오랫동안 건축이라는 이야기를 구성해온 필수 요소다(20)'. 사람들이 건축물을 처음 볼 때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정문이 아니라 다락 창문이나 지하 대피소, 허술한 방충망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도둑들의 방식으로 건물을 본 것이다(41)'. '어떻게 보면 도둑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건축을 잘 이해하는 자들이다. 건물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무단으로 들락거리고, 건물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한계를 무시한다. 일단 문이 필요 없다. 벽에 구멍을 뚫거나 천장을 잘라내면 되니까(22)'. 도둑은 '문도 벽도 지붕이나 천장도 없는 세계, 즉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 같다. 침입절도는 다른 세계로(최소한 다른 방이나 건물로) 이어진 흐물거리는 벽이나 갑자기 튀어나오는 입구로 이루어진 매트릭스의 물리적 재현이다. 당장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두 개의 방은 결국 머지않아 이어진다.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면, 도둑은 캘리포니아에서 헐값에 구한 고물 채굴 장비로 터널을 뚫어서라도 두 건물 사이의 이동 경로를 확보한다. 건축물을 오용하고, 남용하고, 건축 목적과는 정반대로 이용함으로써 이들은 건물들의 '진짜' 사용법을 밝혀낸다(22)'. '...

신극우주의의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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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집적 1 경향은, 자신이 전적으로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자의식을 지니고 있고 또 자신의 계급적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함과 동시에 가급적 강화하려 하는 여러 계층들이 영구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이 계층 집단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혹은 자신들이 사회주의라 부르는 대상을 증오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늘 잠재해 있는 계급 하락의 책임을 그 원인이 되는 장치에 묻는 대신, 자신들이 한때 지위를 누렸던 체제를―전통적인 관념에 따르자면―비판적으로 적대해왔던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은 자주 그렇듯이 객관적인 상황에 의해서 더 이상 그 실체를 유지하지 못할 때 비로소 자신의 악마적인 성격을, 자신의 진정으로 파괴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지요. 마녀재판이 실제로 벌어졌던 때는 토마스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가 아니라, 반종교 개혁의 시대에 와서였습니다. (13) [극우주의에] 가장 영향 받기 쉬운 집단이 특정한 소시민 계급 집단이기는 합니다. 무엇보다도 백화점 등 유사 상업시설이 소매업을 독점함에 따라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는 소상공인들이 특히 그렇지요. 하지만 소시민 외에도, 아시다시피 언제나 위기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농부들도 분명 두드러진 역할을 합니다. 제 생각에는 농업 문제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보조금 지급 등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인위적인 방식이 아닌 제대로 된 방식으로 해결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즉 이성적이고 합당하게 농업을 집산화하는 데 정말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 불길의 진원지는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입니다. (15) 파시즘 운동이 경제와 맺는 관계는 구조화되어 있으며, 이 관계는 바로 저 자본의 집적 경향 속에, 또 빈곤을 양산하는 경향 속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18) 저는 공포의 예견이란 말이 지금 극우주의에 관한 통상적인 견해에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대단히 핵심적인 무언가를 건드린...

성장 없는 번영 -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위한 생태거시경제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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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수십 년 안에 인구가 90억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는 이 세계에서 번영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우리는 다가올 세계에 걸맞은 번영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는가? 생태계의 한계를 더는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징후들이 나타나는 상황에서도 지금의 전망이 믿을 만한 것인가? 우리의 전망을 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어떻게 변화시켜 나아갈 것인가? (16) 지금 세계는 가용 자원이 줄어들고 있고, 환경의 절대적인 한계와 마주하고 있으며, '빈곤의 바다' 위에 '번영의 섬들'이 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이미 부유할 대로 부유한 이들의 끝없는 소득증대가 진정 우리가 바라고 기대할 만한 관심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아닌, 더욱 지속가능하고 공평한 형태의 번영을 이룰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17) 지금의 경제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경제성장을 통해 안정성을 유지한다. 경제가 비틀거리자(2008년 후반에 그 모습이 극적으로 나타났다) 정치인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기업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직장은 물론 집을 잃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침체의 악순환에 빠져든 것이다. 그럼에도 성장에 의문을 제기하기라도 하면 정신이상자나 몽상가, 혁명주의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에 의문을 던져야만 한다. 경제학자에게 성장 없는 경제라는 개념은 저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생태주의자에게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저주이다.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하위 시스템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유한한 생태계 안에 어떻게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경제 시스템이 놓일 수 있는지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답해야 한다. (30) 세계를 재앙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성장지상주의는 경제와 정치 시스템이 지닌 가장 주요한 특징이었다. 또한 성장이라는 지상과제가 현대 경제의 구조를 결정지었고 금융업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견인했다. 성장지상주의는 규...

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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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일하게 완전경쟁 시장의 모델을 볼 수 있는 것은 '치킨시장'뿐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치킨시장에서도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프랜차이즈별로 양극화 현상도 뚜렷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자면 치킨시장 자체는 포화 상태에 가까운 완전경쟁 시장이다. 우리가 꿈꾸는 건전한 자본주의 시장의 증거가 겨우 치킨점이라니 적잖이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완전경쟁 시장이라 부를 수 있어도 치킨업계 입장에서는 과잉 시장이고 피 터지는 '치킨게임'의 현장이다. (56) '대체 치킨은 무슨 맛으로 먹는가'였다. 그런데 오래도록 관찰한 결과, 사람들은 치킨을 닭과 연결짓지 않는다. 치킨 자체가 닭이긴 하지만 우리가 치킨이라 부르는 것은 더 이상 닭이 아니다. 각자 갖고 있는 치킨의 취향은 후라이드냐 양념이냐로 갈리지만 그건 튀김옷이나 소스에 대한 취향에 가깝다. (58) 라면과 믹스커피 그리고 치킨이야말로 한국의 지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음식일 것이다. 그 음식이 닿아 있는 사회의 접촉면이 워낙 다양하고 그 자체로 근대의 음식 형성과 미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74) 그동안 음식칼럼니스트들부터 맛집블로거들, 그리고 대중들까지 치킨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를 생산해놓았다. 당연한 일이다. 파는 사 람도 많고 먹는 사람도 많으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제적 음식'이기 때문이다. 또 각자의 후라이드가 있고 각자의 양념치킨을 가졌다는 점에서 '모든 이'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후라이드치킨의 역사야말로 각자의 경험 속에서 녹아나는 '생활'의 성격을 갖는다. 누구나 첫 치킨을 먹은 경험, 치킨과 얽힌 기억들을 갖고 있으며 각자의 이야기를 떠들 수 있기 때문이다. (75) 만인이 각자의 치킨 역사를 갖고 있다. (75) 더보기... 프랜차이즈 치킨점의 성공 여부는 맛이 아니라 브랜드 인지도와 상점이 입점한 상권의 수준에 달렸다. '정할 것이 없으면 치킨집이나 ...

서울의 심연 - 어느 청년 연구자의 빈곤의 도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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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나는 지난 2019년부터 5년 동안 쪽방촌, 쪽방 거주자, 일선 지원기관들을 참여관찰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지속적으로 대화해 왔다. 그리고 2022~2023년의 1년간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동자동 쪽방촌에 들어가 여름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총 다섯 번의 계절 동안 거주하면서 거주자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9) 01 쪽방촌에 살다 내가 들어갔던 곳은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동자동 쪽방촌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약 1,000여 명으로 쪽방촌들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 사회이며, 철도 교통의 중심지인 서울역과 인접해 있다. 2023년 기준, 동자동 쪽방촌은 도로명주소 기준으로 후암로49길, 후암로57길, 한강대로104마길 등지에 걸쳐 있다. 나는 후암로57길의 한구석에서 살았다. (13) 쪽방촌의 평당 월 30만 원을 상회하는 월세는 사실 심각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나 정작 거주자들에게 이곳은 '싼 맛'에 사는 동네다. 여기서 싸다는 것은 월세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나 보증금이 없다는 의미다. 월세가 점차 오름에도 불구하고 저렴하다는 착시는 여기서 생긴다. 쪽방촌은 (수)백만 원의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머무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38) 02 사회 복지 시설, 쪽방상담소 동자동 쪽방촌에서 거주자가 주로 만나게 되는 일선의 지원 기관은 서울역쪽방상담소(사회 복지 시설, 이하 쪽방상담소), 동자동사랑방(사회 운동 단체, 이하 사랑방), 교회(종교 기관)로 대분되며, 이 기관들은 쪽방촌 빈곤의 감소를 위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 (49) 쪽방상담소는 2008년 오세훈 시장 당시 서울시, 용산구청과 함께 쪽방 전수 조사를 수행한 바 있다. 그때 사회복지사가 돌아다니며 발굴한 쪽방 건물은 60여 채였고, 이후 박원순 시장 때 몇 개 더 추가되어 2022년 말 기준 쪽방 건물 66채, 쪽방 1,287 개가 공식 쪽방으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쪽방상담소가 정의하는 쪽방 거주자는 ...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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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수많은 투쟁과 희생을 치러냈고, 실로 위대한 민주주의를 이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제나름의 진단을 말씀드리자면,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때문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31) 한국인들은 정치의 광장에서는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자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지만, 일상의 공간에서는 공개적으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정치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일상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깁니다. 이제 광장 민주주의는 일상 민주주의로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 거지요. (34) 어느 나라든 교육의 중점은 '적응'에 있는 법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익혀 잘 적응하도록 하는 것, 보통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독일 교육에서는 '적응'보다 '비판'을 더 중시합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독일의 비판 교육입니다.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청소년들이 굉장히 비판 의식이 강합니다. 선생님은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마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배후를 의심해라.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성숙한 민주시민이 된다"라고 가르칩니다. (67) 저는 독일이 백만 난민의 기적을 이룬 바탕에는 인간 존엄을 지키는 것을 국가의 존재 이유로 삼은 국민적 합의, 시민적 의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높은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을 길러낸 것이 독일의 비판 교육이라고 확신합니다. (71) 더보기... 일본은 많은 장점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묶여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시아에서 어느 나라도 일본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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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완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데,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장애가 있는 아이가 '나아진다'는 말은, 종종 '비장애인과 비슷해진다'는 욕망을 함축할 때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서 '나아짐'이라 함은 '걷게 됨'이었다. 내가 받은 여러 치료의 목적이 '조금 더 예쁘게 걷기, 오래 서 있기'에 맞춰져 있던 것처럼. 그때 현미와 나에겐 그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한 발자국 더 걸으면, 조금 더 예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면 그것보다 기쁜 게 없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고, 내 몸을 좀 더 오래 쓸 수 있도록 치료를 받는다. 걷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습한다. (18)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보다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 해낼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장애인 되기'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며 운동하고 싶었다. (20) 병원이 내게 마음의 고향이라면 현미에게는 연대의 공간이었다. 절망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자, 가장 혼란스럽고 괴롭게 느껴질 시기에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눈 공간이었다. (32) 자신과 다른 몸을 가진 딸을 사랑하는 일, 그 아이를 돌보며 보낸 수많은 시간을 표현하기에 '모성'이라는 단어 하나는 부족하다. 모성애라는 단어만으로 현미를 설명하는 건 억압과 욕망을 함께 담고 살아가면서 닮아있는 여성들과 기댈 줄 알았던 현미를 평면적으로 만드는 것만 같다. (37) 굳이 목적을 이야기하자면, 자신은 꽤나 비겁한 종교적 인간이라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만 종교의 힘을 믿었는데 그 순간이 그러했다고 한다. 태균은 나의 건강과 안위를 조금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바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적었다. (49) 내가 '만약'이라는 단어에 갇혀 원망할 대상을 찾아다녔던 순간을. 하지만 결국에는 그 단어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평화를. ...

게으름에 대한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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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공동체의 경우, 농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얼마 안 되는 잉여를 전사와 사제들에게 나눠 주기보단 차라리 잉여가 생기지 않도록 생산을 줄이거나 소비를 늘렸을 것이다. 처음에, 전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을 생산케 하고 잉여를 내놓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한 대가의 일부가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로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들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방법을 쓰게 되자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지고 따라서 지배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었다. (20)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20)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그나마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나 강요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돤 노동을 주장케할 뿐이다. (24) 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이 모든 것을 뒤바꿔 버렸다. 당신에게 고기를 제공해 주는 정육점이나 빵을 제공하는 빵집 주인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해 준 음식을 즐길 때의 당신은, 일하는 데 필요한 힘을 내기 위해 먹지 않는 한 불성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버는 것은 선이고 돈을 쓰는 ...

혁명의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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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인류가 집단적으로 살면서 구현하는 지진이며, 개인의 성격이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지휘할 수 있지만 혁명을 창조하거나 방해하지는 못한다. (32) 모든 혁명은 나름의 원인을 초월하며, '자연스러운' 사물의 경로를 뒤바꾸는 고유한 동학을 따른다. 혁명은 인간의 발명품으로, 불가피한 발생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유의미한 별자리의 랜드마크로서 집단적 기억을 건설한다. 혁명이 역사적 진행의 정기적이고 누적적인 시간에 속한다는 믿음은 20세기 좌파 문화의 가장 커다란 오해 중 하나였고, 너무도 자주 진화론의 유산과 진보 이념의 짐을 짊어졌다. (35) 혁명은 들숨과 날숨을 쉬는 역사다. 혁명을 근대의 랜드마크이자 역사적 변화의 전형적 순간으로 복원한다고 해서 혁명을 낭만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혁명을 서정적으로 회고하고 우상적으로 재현하기 쉽다고는 해도 비판적 시선으로 그 해방적 특징뿐만 아니라 주저와 모호함, 잘못된 길과 철수를 파악하는 것이 방해받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이 혁명의 여러 모순적 잠재력에 속하며, 혁명의 존재론적 강도에 들어 있다. 사회 세력과 정치적 목표—종교,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농민, 민주주의, 사회주의, 반식민, 반제국주의, 민족, 심지어 파시스트 혁명까지—에 따라 혁명을 나누는 고전적 분류는 흔히 연대기적·정치적 경계를 넘나드는 혁명의 정서적 차원을 파악하고자 하는 역사학자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 연속체의 극적인—대부분 폭력적인— 단절로서 혁명은 강렬하게 체험된다. 인류는 혁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정신적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 다량의 에너지와 정념, 정동情動과 감정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에 미학적 전회 aesthetic turn 가 담겨 있거나 그런 전회가 발생한다. (36) 파시즘은 혁명의 수사를 구사하긴 했지만 분명 반혁명적 성격을 드러냈다. (38) 혁명은 의식적으로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반역이다 . (41)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좋든 나쁘든 간에 혁명이다. 여기서...

다시, 케인스 - 다음 세대가 누릴 경제적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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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우리 안의 옛 아담 1 의 세속적 본능이 너무 강해져서, 이를 충분히 만족시키려면 다들 어느 정도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부유층과는 달리 우리 자신을 위해 더 일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소한 작업이나 임무, 일과도 신이 나서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버터 위에 빵을 얇게 펴 바르려고 노력할 것이다. 즉 이미 우리 사회가 가진 것들을 가능한 한 더 폭넓게 누릴 수 있도록 애쓸 것이다. 3교대로 일하거나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해도 아주 오랫동안 경제적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3시간 정도의 일이면 우리 대부분이 내면의 세속적 본능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55) 문제의 본질은 케인스가 그 어디에서도 분배에 대해 충분히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분히 만족할 정도의 소득을 얻지만, 아직도 세계 인구의 약 50%는 하루에 2달러가 안 되는 돈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중 약 10억 명은 하루에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연명한다. 이런 사람들은 매일 먹고사는 경제 문제를 겪고 있고, 우리 사회는 그들이 직면한 문제에 아직 답을 주지 못했다. (88) 케인스는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에서 "경제 문제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거나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그보다 더 위대하고 영구적 중요성이 있는 다른 문제들을 희생하면 안 된다..."라고 결론짓는다. 한편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케인스가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적어도 일부 국가에서는, 그리고 보편적으로 가장 성공했다고 인식되는 국가들에서는 경제 체제가 만족을 모르는 욕구를 만들어냈다. 이런 욕구로 인해 우리가 인식하는 경제적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더 위대하고 영구적 중요성을 가진 다른 문제들'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계속 제단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124) 답은 꽤 명확해 보인다...

오월의 정치사회학 - 그날의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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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날의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와 5·18 당시의 국가 폭력이 여타 폭력들과는 구별되는 다른 성격이었다면, 우리는 통상 학살로 칭하는 이 폭력의 독특한 성격에 주목해야만 한다. 즉 '반대파에 대한 산발적인 폭력이나 고문 등 여타의 억압 수단을 동반하는 국가 테러'와 '정책 결정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정책인 학살'을 구분해 분석할 때만이 오월광장의 의문에 답할 수 있는 학술적 통로를 열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5·18 연구의 무게중심을 피해자의 서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가해자에 대한 논의로 이동시키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7)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이승만의 언술은 이 같은 최고지도자의 행동양식과 동인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에 불복하거나 전복하려는 권리를 허락한 일이 없나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막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도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최초 정부의 출범 선언은 국민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시작된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반공이 하나이며, 자신에 대한 반대도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는 걸 공식화한 것이다. (20) 더불어 한국의 경우 정규군이 학살에 참여하는 주요 동인으로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요소(명령체계에 따른 복종, 동료집단의 압력과 집단의 순응성, 이데올로기 주입 효과)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근대 정규군의 일반적 특성으로 일컫는 '명령체계에 따른 복종' 문화다. '한국군은 그 모태가 된 일본군, 더 좁게는 일본 육사 출신'의 영향으로 미국이나 여타 서구에 비해 훨씬 강력한 "계급별, 학년별, 선후배별 지배와 복종 관계가 철저히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한국군은 해방 정국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근대국가 건설기와 베트남전 당시 해외 파병에서 이미 두 차례...

차녀 힙합 - 집밖의 세계를 일구는 둘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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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녀가 이렇게 구구절절 서러운 줄 몰랐습니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위로조차 건넬 수 없는 '잉여'이자 '덤'으로 여겨(12)'지고, '첫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중압감을 느낀다면 차녀는 어둠 속에서 대사 한 줄이라도 더 얻어보려고 발버둥치는 무명배우 같(21)'거나, 차녀가 '소유하는 모든 것이 중고(133)'인 줄 몰랐습니다. 작가처럼 '아들을 낳기 위한 여정에 잘못 도착한 택배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낀 딸'일(12)' 때는 더욱 말이죠. 차녀는 세 갈래로 나뉩니다. '딸이 둘 있는 집의 차녀는 차녀이자 막내'이고, '밑에 여동생이 있는 차녀는 차녀 카테고리에서 다시 중녀로 분류'되고, '세 자매 중 둘째는 막내인 차녀보다 애매한 존재라 아래위로 치(254)'입니다. 차녀 앞에는 세 갈래의 미래가 나타납니다. '부모님이 세번째 출산을 감행하여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중간에 낀 딸이 되거나, 세번째도 딸이어서 세 자매 중 중녀가 되거나, 이대로 차녀이자 핵가족 시대의 새로운 막내로 살아가거나. 어느 길로 가든 다른 갈래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88)'습니다. 중간 아이 콤플렉스 Middle child syndrome 라고 있습니다. '가운데 아이는 출생 순서상 집에서 배제되거나 무시되거나 방치될 가능성이 높기에, 사진도 가장 적고 양육자가 그들의 특성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19)'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짬 처리반으로 살며 몸에 익힌 생존 기술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주변을 두루 돌보고 항상 배려해야 한다는 한국 여성 훈육법과 만나 시너지(69)'를 냅니다. 식빵으로 비유하자면 차녀의 몫은 언제나 테두리입니다. '딸이 둘 이상인 집에서 스타일 차이가 생기는 데에는 출생 순서에 따른 양...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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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의 죄가 크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피도 눈물도 없는 삭막한 곳으로 묘사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 죄를 죄다 찰스 다윈 Charles Darwin 의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 '에 뒤집어씌웠다. '적자생존'은 원래 다윈이 고안한 표현도 아니다. 다윈의 전도사를 자처한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 의 작품인데 앨프리드 월리스 Alfred Wallace 의 종용으로 다윈은 《종의 기원》 제5판을 출간하며 당신 이론의 토대인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을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다윈의 죄는 거기까지다. 《종의 기원》은 물론,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과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그는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오로지 주변 모두를 제압하고 최적자 the fittest 가 돼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양한 예를 들어 풍성하게 설명했다. 그의 후예들이 오히려 그를 좁고 단순한 틀 안에 가둔 것이다. 이 책은 그 틀을 속 시원히 걷어낸 반가운 책이다. (4) 협력은 우리 종의 생존에 핵심이다. 우리의 진화적 적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적자'라는 개념이 '신체적 적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 논리를 야생에 대입하면, 덩치가 클수록 더 싸우려 들며 그럴수록 덤비려는 자가 적고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최상의 먹이를 독차지할 수 있고 가장 매력 있는 짝을 얻을 것이며 가장 많은 후손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150년 동안 이 잘못된 '적자'의 해석이 사회운동, 기업의 구조조정, 자유시장에 대한 맹신의 바탕이 되어왔으며, 정부 무용론의 근거로, 타 인구 집단을 열등하다고 평가하는 근거로, 또 그런 평가가 야기하는 결과의 참혹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어왔다. 하지만 다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