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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의 사회사 - 기록되지 않았던 미술 이야기

표구의 사회사 - 기록되지 않았던 미술 이야기
  • '표구'란 종이나 비단에 그린 작품의 감상과 보존, 보관, 이동을 위해 가장자리와 뒷면을 튼튼하게 보강하는 일이다. 이런 표구의 기본 목적은 작품의 뒷면에 종이를 두 겹, 세 겹으로 발라 튼튼하게 만들어 보존하기 쉽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작품에 어울리는 여러 색깔과 무늬의 비단을 배치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 일도 보존 못지않게 중요하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훼손되었거나 낡은 작품을 수리 • 복원하는 기술까지도 포함된다. 이처럼 표구로 마무리하는 과정이 필요한 작품으로 종이나 비단에 먹이나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꼽을 수 있고 서예나 자수, 탁본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표구 과정을 거치면서 족자, 병풍, 액자의 형태를 갖추게 되고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세워져 감상의 대상이 될 준비를 마친다. (17)
  • '표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종이나 비단에 쓰인 글씨와 그림, 곧 서화(書)의 뒷면에 다른 종이를 덧발라 보관과 사용하기 쉽게 만드는 기술은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 중국에서는 이 기술을 가리켜 '장황(裝潢)', '장배(裝背)'라고 했다. '장(裝)'은 '단장한다' 즉 꾸민다는 뜻이며 '황(潢)'도 '책을 꾸민다'는 뜻을 지니는데 동시에 황벽(黃蘗)나무 즙으로 염색한다는 의미도 있다. 곧 책 표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일을 가리키며, 고대 불교 경전을 황벽나무에서 뽑아낸 노란 즙으로 물들인 데에서 비롯되었다. 황벽나무의 즙은 벌레나 세균이 싫어해서 이렇게 물을 들이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
  • 일본인 표구사가 차린 전문 상업 표구점은 확실히 조선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실 비단 상업 표구점뿐이 아니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미술'과 관련된 모든 것이 조선에게는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아니, '미술'이란 용어 자체가 낯설고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대표하는 신조어였다. 조선시대까지 한국에는 '미술'이란 용어가 없었다. 그림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채색으로 그린 그림을 뜻하는 '회(繪)'와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가리키는 '화(畵)'라는 글자가 따로 사용되거나, 혹은 글과 그림이 합쳐진 '서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미술이란 용어는 1881년 일본 시찰단의 보고서에 이어 『한성순보』 17호(1884년 4월 6일자)에 처음 등장했다. (60)
  • 수송표구사 관련 신문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왕실에서 작업했던 장인조차도 '표구' 이전에는 어떤 용어를 사용하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표구는 드러나지 않는 행위였다. 따라서 '표구의 발전'을 설립 목적으로 내세운 고금서화관의 등장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커다란 변화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표구사가 전문적인 기술직으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73)
  •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표구사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일본인 표구사가 조선에 정착하면서 비롯된 표구는 새로운 문물의 하나로 유입된 측면이 강했다. 미술의 대중화와 함께 표구에 대한 인식도 높아갔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한국인 표구사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해방 이후 한국의 표구업을 담당하였다. 사회 전반적인 서구화 흐름 속에서도 표구 수요가 꾸준히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근대미술 시장이 고서화 및 동양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금서화관에서부터 조선미술관에 이르기까지 작품 판매를 담당하는 공간에서 표구업을 겸업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지속되었고 반대로 표구점에서 동양화를 매매하는 일도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107)
  • 이효우는 서울 비단처럼 고급 비단이 시장에서 밀려나는 이유로 자수 병풍 붐을 비롯해 표구업계의 양적 팽창을 꼽았다. 그는 "표구의 전성기라고 한다면 표구 일감이 제일 많은 시기라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사실 그때가 기술적으로는 가장 떨어지는 시기였어요.”라고 1970년대를 진단했다. 앞에서 살펴본 표구 기술의 질적 하락과 저렴한 표구 재료의 사용은 1970년대 표구업의 팽창이 불러온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바꾸어보면 표구의 대중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했다. (153)
  • 1978년 여름, 독일로 와서 회화 보존처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김용복은 65세의 나이에도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리고 1년 6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80년 초부터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서 동아시아 회화의 보존처리를 시작하였다. 유럽에서는 표구에 필요한 작업 도구나 재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한국에서 공수해 갔다. 일본이나 중국의 두루마리를 수복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은 독일로 가는 도중에 일본에 들러 구매하였다. 김용복이 독일에서 체류하며 진행한 모든 작업 과정과 수복 방식은 꼼꼼하게 기록되었다. 독일의 민족학 연구자들은 김용복으로부터 표구에 대한 지식을 가능한 한 많이 습득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의 표구에 대해서는 유럽권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었지만 한국의 표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자들은 표구 분야의 기술적 사항뿐만 아니라 전통미술을 둘러싼 한국 문화 전체에 대해서 주목했다. (233)
  • 1980년대 중반 무렵 인사동, 관훈동, 견지동 부근의 오래된 표구점들이 하나둘씩 '화랑'이란 새로운 간판을 내걸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오래전부터 표구점이자 화랑이었지만 '화랑'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본격적인 화상으로 나설 것을 천명한 것이다. (260)
  • '표구'라는 일본 용어 대신 '장황'이라는 조선시대의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무렵부터 등장하였다. 조선시대 도화원에 소속되었던 배첩장을 계승하는 의미로 문화재청에서 국가무형문화재의 하나로 '배첩장'을 처음 지정한 시기도 1996년이었다. 이때 최초로 김표영이 배첩장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표구사들의 구술채록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008년 국립예술자료원에서 추진된 예술사 구술채록사업에 표구사 이효우가 구술자로 선정되어 20세기 이후 한국 표구사의 체험과 활동을 기록하였다. 2011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세기 이후 표구의 변모를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려는 취지에서 김표영을 비롯한 네 명의 표구사들의 구술채록을 실시하기도 했다. 국가 기관에 의한 이러한 기록사업은 표구사가 전통문화의 계승자로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자격시험으로 문화재수리기능자 '표구공' 종목이 생기면서 국가에서 표구사의 기량을 인증해주는 방식이 운영되고 있다. (265)
  •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표구점-화랑은 이제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춘 공장, 화랑, 문화재 보존, 그리고 소규모 표구점 등의 영역으로 쪼개져서 각자 운영된다. 현재 표구, 표구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배첩장', '표구공', '표구사', '장황사', '보존과학자' 등 이들 각각의 이름 속에는 그 용어들이 탄생하고 사용되던 시대의 모습이 녹아 있다. 이처럼 닮은 듯, 서로 다른 얼굴과 성격을 지니고 오늘날 표구는 존재하고 있다. (267)

표구의 사회사/김경연, 이기웅, 김미나/연립서가 20220831 344쪽 25,000원

종이로 만든 두루마리나 첩(帖), 책을 보호하려는 기술인 '장황(裝潢)'은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 불교의 전파와 함께 한국과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지금 사용하는 '표구'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왜말에서 유래했다. 관직명이었던 '장황' 대신 '표구'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배경은 알려지지 않지만, 1910년 전후로 진출한 일본인 전문 상업 표구점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1910년대에 등장한 표구점은 서화(書畵) 판매와 표구업뿐만 아니라 종이, 비단, 붓, 먹과 같은 재료 판매까지도 하면서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대에 골동품과 전통 고서화(古書畵) 열풍으로 표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번성하였다. 당시 대다수가 한옥이었던 주거 공간에는 서양화보다는 족자나 병풍을 놓아야 구색이 맞았기 때문이다.

해방되자 생계를 이어가려는 표구사들은 도배나 주택 수리도 했다. 침체하였던 표구업은 1960년대 중반 무렵부터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경제개발과 함께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며 집을 장식할 그림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표구업은 경제가 고도성장기에 들어선 1970년대에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도제식 교육으로 전수하던 표구 기술은 1970년대에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러한 수요에 맞춰 표구 기술을 속성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늘어났다. 1970년대 동양화 붐이 표구업의 번창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표구 기술이 하락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강남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림 수요도 급증했다. 표구의 수요가 늘면서 액자 형태도 다양해졌다. 1980년대 여성잡지는 원로 동양화가들의 작품을 인쇄한 동양화를 부록으로 만들어 액자나 병풍으로 표구할 수 있게 했다.

88올림픽을 전후하여 무게중심은 서양화로 옮겨갔다. 동양화가보다 서양화가가 많아지고 작품 제작도 서양화가 더 많아졌다. 표구점은 화랑으로 변신하고 갤러리를 운영하며 동양화 외에 다른 장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 이래 한국 미술 유통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표구와 화랑업의 겸업이 사라지며 미술 시장의 판도가 달라졌다.

1970년대는 자수 병풍과 병풍계(屛風契)로 표구사가 턱없이 부족했던 표구의 전성기 시대였다. 표구업계가 위축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에 표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등장했다. 표구는 계승하여야 할 전통문화의 하나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의 하나로 '배첩장'을 지정하는 한편 국가자격시험으로 '표구공'이라는 종목도 생겼다.

표구 역사는 표구에 대한 사료나 표구물도 많지 않아 구술에 의존하고 있다. 저자는 "표구는 작품의 안과 바깥 사이 경계에 위치하며, 작품의 구성에 관여"하여 그림과 프레임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표구까지 포함한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표구 가운데 족자와 두루마리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족자는 액자나 병풍과 달리 지지체 없이 말고 펴는 과정이 반복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꺾임 방지를 위해 종이에 유연성을 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까지만 해도 표구사가 요즘 스타벅스만큼 있었던 기억이 난다. 표구사와 표구점이 점점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은 귀한 것이다.